My story/쟈스민 수필

짝의 책보

나일강의백합 2022. 4. 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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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필감상 194 ▶ 임금희 수필가 ⇒ 《달콤한 절망 첫사랑》 ⇔ 〈짝의 책보〉

♥ 오늘의 수필감상은 리더스에세이문학회 2021 테마에세이의 《달콤한 절망 첫사랑》에 수록된 임금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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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의 책보

 

 

임금희

 

 

 

베보자기로 곱게 싼 선물이 토속적이다. 아래층 아줌마가 양갱이 많이 들어왔다고 나눠먹고 싶은 마음에 가져왔단다.

고마워요. 잘 먹을께요.”

눈을 떼지 못하고 펼치지도 못하고 그 베보자기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향토색이 짙은 베보자기를 어떻게 쓸 생각을 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몰랐을 게다.

 

누런 삼베보자기를 보면 어린 시절 짝꿍의 책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언제나 삼베로 된 누런 책보를 등에 사선으로 메고 다녔다. 옷도 낡은 누런색이거나 회색, 갈색으로 늘 허름했다. 짝꿍의 뒷모습은 한폭의 동양화였다. 책 몇 권과 몽당연필 하나, 너덜너덜한 공책 한 권이 들어있는 책보는 등에 착 붙어서 가뿐해 보였다.

기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에서 짝은 멀찍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달리는 기차의 힘을 그 작은 몸으로 버티며 기다린다. 나는 멀찍이 서있어도 기차가 내는 바람의 힘에 뒷걸음질 치기도 하는데. 신호등은 경박하게 딸랑거리면서 경계를 주었다.

눈썹이 짙고 머리털은 짧아서 밤송이 같았고 이목구미가 강했다. 이름이 생각 안 난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신작로를 한참 걸어야했다. 짝과는 집이 비슷해서 거의 같은 길을 걸어갔다. 짝은 앞서가고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길옆으로는 질경이가 납작 엎드려있고 짚차가 지나가면 먼지가 풀풀 나서 앞서가던 짝꿍의 뒷모습이 뿌옇게 흐려지곤 했다. 우리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길옆 풀들도 먼지를 뒤집어썼다.

가끔 달구지가 지나간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태워달란 말을 못하는데 멀찌감치 앞서가던 짝은 얻어탄다. 뒤를 바라보고 앉아서는 나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마구 달려서 나도 탔다. 감히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을 짝 때문에 해보았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우리는 서로가 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갔다. 발을 흔들며 덜그럭거리는 달구지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짝의 집은 정말 가난했다. 준비물을 못 갖고 오는 짝에게 연필과 크레파스를 같이 쓰고 수수깡을 나눠주었다. 점심시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안보였다. 짝하고는 말을 나눈 게 별로 없다. 금방 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에 말할 기회를 놓친 것일까. 그래도 몇 마디 말은 했을 텐데. 그 시절을 몇 번 테이프감듯이 되돌려보아도 말을 한 기억을 찾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한 어린 내가 있을 뿐이다. 달구지에서 아무 말을 못한 아쉬움 때문에 아마도 나는 말을 나눈 것을 다 잊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첫사랑이었던가. 그보다는 아릿하고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했다.

 

결혼 전 한 번 그곳을 갔었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과 막연한 그리움이 있었다. 기차역에 내리니 생소함과 낯선 곳에 홀로 선 두려움이 밀려왔다. 철로 건널목을 건너 집으로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신작로를 걸었다. 참으로 작은 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군인 관사가 있던 곳, 우리집이 있던 곳은 덤불만 무성하고 그 다음부터는 적막하고 으슥한 길이 꼬불꼬불 이어져있어서 도저히 더 이상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내가 자두를 따먹은 과수원이 있고 삼신할미같은 할머니가 사는 집과 우물이 있을 텐데.

신작로 건너편으로 논들이 넓게 펼쳐있고 그 멀리 짝의 동네가 있었다. 사람도 거의 만날 수 없는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볼 용기도 못 내고 되돌아왔지만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성당이라도 찾아가 볼 걸.

 

시간을 거슬러 가다보면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토막토막 잘려져 있음이 느껴진다. 머릿속에서 온갖 지혜를 짜내어 이어 붙이려고 무던히 애쓰기도 한다. 잘려진 조각에는 인연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이 늙지도 않고 아직도 나와 정을 나누었던 그 모습으로 살아숨쉰다. 가끔은 한 장의 필름을 현상하면서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인가하는 아쉬운 마음에 한숨지어진다.

 

베보자기를 고이 접으며 책보와 함께 기억되는 짝을 되새기니, 가슴이 쪼그라들고 아릿한 풋내음에 목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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