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쟈스민 수필

마당안의 아이

나일강의백합 2021. 6. 4. 10:51

 

마당안의 아이

 

                                                                                               -  임금희  -        

 

기억이란 신비스럽다.

기억 저 편으로 실을 드리워 살살 잡아당기면 실은 끊어질듯 말듯이 당겨온다. 내 기억 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를…. 마치 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아득한 기억을 퍼 올린다.

 

한낮 뙤약볕에 반짝이는 마당이 있다.

나 어릴 적 우리 가족은 경북 영천에서 살았다. 기와집에 툇마루가 있고 댓돌 아래 서너 계단 내려가서 넒은 마당이 있고 끄트머리에 대문이 있다. 언니는 서울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고 동생들과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나의 아픔이 녹아있는 영천 집은 몽환적인 기억의 조각들이 스며있으며 구름에 가려진 듯 아련하기만 하다. 전생의 느낌과 하늘 멀리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어머니가 ‘엎드려!’ 하면 자동적으로 엎드려서 주사를 맞았던 기억, 뒷간에 가서 볼일을 보면 못 일어나서 어머니를 불렀던 일들이 기억난다.

 

동생은 활달하고 극성스러웠다. 언제나 마당 밖의 세상을 꿈꾸듯이 궁금해 했다. 한번은 동생이 없어졌다.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나를 걸리고 거리를 헤맸다. 한낮의 태양아래 대기는 타들어가고 모든 것이 빛을 받아 영롱했고 자주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동네 여기저기를 수소문한 끝에 동생이 우리 집에 자주 오던 거지아이를 따라간 것을 알았다. 그 다음날 찾은 것 같다.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고 올라오는 동생을 찾았다.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깡통치마를 입고 다리 밑 개울가에서 거지아이와 같이 올라오던 동생이 바로 어제인 냥 생생히 떠오른다. 동생은 마당이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꿈은 보이지 않는 곳을 향했고 도전정신이 강했다. 영리했고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 성격이었고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조잘대고 노래도 잘 부르고 기가 강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다.

 

반면 나는 마당 밖을 못나가는 허약한 아이였다. 그때 나는 대문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는 개미와도 같이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고 마당은 한없이 크고 눈부시게 빛났다.

 

그 마당 안이 나의 세상이었다. 볕을 쬐느라 쪼그려 앉거나 툇마루에서 동생이 떨어지지 않도록 돌보면서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마당 담벼락 양지바른 곳에 서 있으면 누군가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리쬐는 햇볕을 타고 내려오듯이 까마득히 부르다가 여운을 남기며 멀어져갔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소리가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한다. 허약함에서 오는 환청일까.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영천마당을 떠올릴 때 가끔 그 소리가 아득히 느껴졌다.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마음 속 소리 같기도 하고 하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영천을 기억할 때마다 들리던 그 소리가 그립다.

 

 

매일 주사를 맞았다. 폐에 문제가 있었다.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빨리 발견하여 살았을 것이다. 저녁때가 되면 추위를 타며 오들오들 떨어서 바로 병원을 가서 조기발견으로 치료가 쉬웠다고 어머니는 추억담으로 말씀하시면서 그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되뇌곤 했다.

두려움에 떨면서 잠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무섭다. 발치에 어떤 시꺼먼 짐승이 누워있었다. 그것이 무서워서 눈을 제대로 뜨질 못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포에 떨었다. 아직도 그 시꺼먼 물체의 발이 생각난다. 돼지처럼 발굽이 있고 털이 있는 꺼먼 발이었다. 사람의 탈을 쓴 검은 괴물같이 느껴졌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아침이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환각이었으리라.

 

사그라질 듯이 힘이 없던 심장이 펄떡 뛴 적이 있다. 어머니와 같이 영천시장에 갔을 때였다. 뒷간에 갈 때마다 밑이 빠지는 나에게 삶아 먹이려고 자라를 사러 갔다. 시장은 뜨겁고 여기저기 외침과 먼지와 부산스러움이 있었다. 모두가 바쁘고 활기찼다. 어머니는 달걀도 샀는데 꾸러미가 신기했다. 볏짚으로 엮은 달걀꾸러미는 달걀을 보듬어 안고 있듯이 보였다. 그 자리에 서서 어머니는 계란 먹는 것을 보여주었다. 계란 양쪽으로 구멍을 내고 한 쪽에 입을 대고 빨면 계란이 다 나왔다. 그 고소함이란…. 그 후부터 날계란을 가끔 먹었다.

 

서서히 나는 회복되었고 허약한 몸을 이겨냈다. 굳건히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걸 보면 하늘의 도움과 부모의 도움이 컸다. 어머니는 너무나 가벼워서 자꾸만 하늘로 오르려던 아이를 잡아끌어 땅위에 세워놓았다.

가끔 꾸러미를 생각한다. 쌀을 다 내준 볏짚은 달걀이 깨질까봐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다. 그때는 못 느꼈지만 그 꾸러미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렇게 보호받고 볏짚 같은 존재 덕에 살아가지만 무심히 잊고 그저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도 아이들을 보면서 느낀다. 아이들도 혼자 버티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아이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잠재력이 있다. 말하지 못하는 많은 무서운 일들을 겪는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아이도 어렸을 때부터 말 못하는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생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더러는 잊고 더러는 아픈 상처를 치유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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