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쟈스민 수필

바람

나일강의백합 2012. 8. 12. 11:16

 

 

바람

  창문을 흔들흔들 두드리면서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는 바람이 분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바람이 동반되는 겨울은 추움 그자체이다. 바람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한창 꽃다운 이십대일 때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을 때였다. 직장도 안정된 곳에 다니다보니 여기저기서 소개도 많이 들어오고 나름 인기도 좀 있었기에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때는 남자들이 끈질기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약속을 하고는 바람을 맞힌 적이 많았다. 그때도 직장일 관계로 여럿이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노래를 잘 불렀던 사람이었다. 계속 만나달라고 청하길래 나중에는 거절도 못하겠고 해서 약속을 하고는 바람을 맞혔다. 그 후 며칠 지나서 전화가 왔다. 그 만남이 직장하고도 연결이 된 상태여서 아마도 전화번호를 알았으리라.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감기가 많은 들은 목소리였다.

“저 000입니다. 지난번 약속한 사람인데 한꺼번에 바람을 맞다 보니까 감기가 걸렸네요. 이 겨울에 안팎으로 호된 바람을 맞으니까 아무리 건강해도 소용이 없네요.”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미안하던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누구네 귀한 아들인데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 모질지도 못하고 임기응변이나 거짓말로 두루뭉수리 넘어가지도 못하는 성격이라서 사과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가 떨어지게끔 멋진 저녁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다음날 퇴근하고 저녁에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미안했다. 너무나 순진한 사람을 내가 너무 무시한 느낌에 정중히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바람을 맞히지 말아야겠다는 나름의 철칙을 세웠다. 그는 참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는 가수가 꿈이라고 했다. 지금은 음악다방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나중에 꼭 인기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얘기하는 그의 열정을 보면서 바람을 맞았으면서도 포기하지않고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거는 그 용기가 그가 꼭 꿈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바람 맞힌 것은 그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안이라서 사람들이 많은 착각을 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나이를 솔직히 말하고 나보다 한참 어린데 그걸 대범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냥 바람을 맞힌거라고 털어놨다. 그러고 그냥 친구처럼 대하자고 말하니 저으기 놀라긴 했지만 금방 순응을 했다. 우리는 그 후 가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영화도 보면서 지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전화로만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유야무야 소식이 끊겼다. 그가 주로 거는 편이었는데 그가 너무 바빠졌고 나 또한 새로운 일에 당면하고 있었다.

  그는 그 후 가수가 됐다. 그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나는 멈춰 서서 그 노래를 한참이나 들으면서 앞으로의 그의 장래가 탄탄대로 승승장구이기를 빌어 주었다. 그는 그의 꿈대로 인기가수의 길로 갔고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서로의 갈 길로 갔지만 내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기억이란 신비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가끔 다른 바람을 일깨우니…….

  같은 바람이지만 다시는 해서는 안 되는 너무나 다른 바람. 꽃다운 나이 때의 그 바람이 내게서 사라졌다. 아쉬운 한 가지가 세월 저편으로 가버린 것이다.

 

                                                  (2012. 2. 24 강남수요수필 정기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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